희망의 신학이 아닌 절망의 신학으로서의 몰트만 신학-조창훈
2008학년도 1학기
몰트만 신학과제
總神大學校 大學院
神學科 組織神學 專攻
趙 唱 訓
Ⅰ. 서론
Ⅱ. 그리스도교는 이 땅의 변혁과 투쟁이다.
1. 희망은 하늘의 영원이 아니다.
2. 희망은 이 땅 뿐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이다.
4. 그리스도교는 이 땅의 변혁과 투쟁이다.
Ⅲ. 미래가 하나님이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2. 미래가 하나님이다.
Ⅳ. 부조리한 사회를 고치기 위해 희망이 필요하다
1. 부조리한 사회를 고치기 위해 종말론이 필요하다.
2. 낙담과 절망이 죄의 뿌리이다.
Ⅴ.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사건일 뿐이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사건일 뿐이다.
2. 부활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3. 부활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4. 부활 보고는 선포일 뿐이다.
5. 부활은 부활 보고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6. 십자가에 달린 자와 부활한자는 변증법적으로만 동일하다.
Ⅵ.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사건이다.
2.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3.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4. 십자가의 사건은 삼위일체론적이다.
5.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6. 발트나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단순한 사변일 뿐이다.
Ⅶ. 성령은 십자가 사건에서 발생한다.
Ⅷ.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할 뿐이다.
1.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참여하고 있다.
2.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믿음이 없어도 의인으로 인정하신다.
3. 모든 사람들을 믿음 없어도 의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4. 복음 선포는 진리가 아닌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할 뿐이다.
5. 계시는 교리전달이 아니라 자기 실존 이해일 뿐이다.
Ⅸ. 나오는 말
Ⅰ. 서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더 악해져서 성경도 자기의 더러운 욕심과 헛된 망상을 따라 왜곡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역사상 수많은 이단이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필자가 살펴볼 몰트만이다. 20세기 중후반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중의 하나는 몰트만이라 할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의 특징은 종말론이다. 그런데 이 종말론은 19세기 후반부터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 또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이 종말론이 발트를 비롯한 ‘변증법적 신학’의 창시자들에 의해 주석 분야만이 아니라 이제는 교의학 분야에서도 연구의 중심에 놓여졌었던 것이다. 이 종말론을 몰트만은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사회주의 국가가 한창 꽃피웠을 시기에 몰트만의 신학은 중남미와 군사정권하에서 아직 경제적 부와 분배가 실현되지 않을 때에 몰트만의 신학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오늘날 부의 분배는 여전히 남아있고 약자는 여전히 약자일 뿐이다. 이때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 하나님을 이 땅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는 것처럼 묘사하므로 사람들은 쉽게 이 신학을 따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신학이 기독교적인 용어를 썼을 뿐 사실은 정치적인 소설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참다운 신앙으로 회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먼저 필자는 몰트만의 사상을 선명하게 드러내도록 노력하였다.
필자는 몰트만이 이 책들을 쓴 목적들과 그 사상적 방향성을 먼저 논하고자 하였다. 보통 이론이 먼저 오고, 실천적인 것은 뒷부분에 언급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이론전개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이 땅의 변혁이므로 이것을 먼저 논하였다. 그 후에 이런 목적을 위하여 전개한 그의 이론의 근거들을 하나씩 하나씩 논하였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미괄식 구성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여겼다. 이렇게 전개하면 그의 사상 전개의 목적과 근거들을 뚜렷이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연구 범위는 몰트만의 유명한 두 책『희망의 신학』,『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다.
2008년 한 학기 동안 몰트만의 신학에 대해서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 중의 한분인 서철원 선생님에게 직접 지도받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며, 그 해박한 지식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존경과 자상어린 돌보심에 감사를 드린다. 필자는 그 깊이와 넓이를 좇고자 평생을 노력하고자 한다.
Ⅱ. 그리스도교는 이 땅의 변혁과 투쟁이다.
1. 희망은 하늘의 영원이 아니다.
칸트 철학에서 시간을 넘어선 미래는 없다. 현대 신학에서 하나님이 시간 내로 들어오는 것은 없다. 현재 삶이 현재이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시간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앞으로 되어질 현재가 하나님이다.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다. 좋아진 세계가 하나님이다. 현재가 영원이다. 현재 있는 것이 영원한 것이며, 영원은 여기서다. 미래가 아니다. 신앙인은 현재적이니까 영원을 얻는다. 시간 밖의 미래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영원이고 현재적 삶이다. 미래에서 좋아질 세계는 여기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미래 삶이 아니고 현재 삶이 영원 얻는 삶이다.
몰트만은 정통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참 소망을 참되신 하나님과 천국에 둔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하늘의 영원이 아니다. 탄식의 골짜기를 벗어나서 상상 속의 행복한 하늘나라로 날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의 영역이든 아니면 내면적 마음의 영역이든 어떤 다른 영역에로 추방 시킬 수 없다. 신앙은 이 현실을 뛰어넘어 하늘나라나 유토피아를 바라보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의 다른 현실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서 몰트만은 천국을 단지 상상속의 하늘나라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나 몰트만이나 우리 손으로 창조 구조 완전히 바꿈을 목표로 하는데 매력적으로 보이나 악한 사상이다.
2. 희망은 이 땅 뿐이다.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오직 이 땅만을 바라보게 된다. 영을 좇기 보다는 육체를 따르게 된다. 그래서 몰트만은 땅에 부착하게 되었다. 그 생각도 그러하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희망 가운데서 영혼은 이 땅과 결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희망이 인식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가 서 있는 이 땅의 미래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죽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십자가가 이 땅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땅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몰트만은 내세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땅만을 바라본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이다.
근세의 이념은 자연과 자유의 관계에서 자유 극대화 위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 자연을 제약해야 한다. 몰트만의 이념은 사회와 자유의 관계에서 자유 극대화 위해 사회를 극복해야 한다. 사회를 제약해야 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정치적인 것’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투쟁과 복수의 조직과 규칙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인 것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이러한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신앙의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의 영역 내에서 영위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는 인간에게 자유케 하는 행동을 추구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더 나아가 다른 여러 자유의 운동 즉 사회주의, 민주주의, 인도주의, 반종족주의 운동등과의 대화와 협력을 주장한다. 몰트만은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운동이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몰트만에 의하면, 민주주의가 없이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며 사회주의가 없이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만약 우리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간과한다면 인간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가 없으며 인종적인 동일성조차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구체적으로 몰트만은 경제, 정치, 문화 등의 다섯 가지 차원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정치학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결과로부터 교회와 국가 혹은 교의학적 신조와 정치적 행동 간의 관계를 추상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것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인간의 삶과 살아 있는 인간성을 방해하고 억누르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정치의 종교적인 문제들, 즉 법, 억압 및 악순환의 문제들과 구체적으로 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의 자유와 확실성과 기도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영의 내적인 경험이 그리스도의 미래와 해방된 피조물의 기대(Antizipation-번역자는 선취라 번역함, 여기서 서철원 교수는 예상, 기대라고 번역하였음)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와 같이 게토(Ghetto)의 개방, 병든 사람의 회복, 사회정의를 위한 새로운 법률 혹은 효과적인 해방의 혁명도 그리스도와 그의 해방된 피조물을 앞당겨 오는 기대이며, 정치적 상황의 수평적 차원과 대립되는 신앙의 수직적 차원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다가오는 새 창조의 세력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죽음을 초래하는 이 세상적 구조 세력과 투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몰트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으로만 축소하였다. 그러나 정통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땅에서도 확장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된다.
4. 그리스도교는 이 땅의 변혁과 투쟁이다.
몰트만의 목표는 자유와 정의이다. 몰트만은 사회변혁을 언급한다. 삶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희망해야 한다. 사회 변혁을 꿈꾼다. 몰트만에 의하면, 현실을 알고 현실을 고쳐야 한다. 신앙은 투쟁이다. 그러나 몰트만에게는 현실을 고치는 프로그램은 없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는 현재의 타개와 변혁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상과의 불화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더 이상 주어진 현실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 현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그것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기독교적 실존은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뒤를 따르면서 인간 자신과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의 신학은 실천적인 이론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한 실천적인 투쟁의 논리이며,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의 이론도 될 수 없고, 세계사적인 기독교 이론도 될 수 없다. 이 신학은 변증법적 역사신학이며 세계사의 신학이 아니다. 이와 같이 몰트만에 의하면, 자연을 정복해서 자유 극대화하는 것이 근대인의 이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부조리한 제도, 산물이 자유 억제한다. 그러나 오직 참아야 한다. 몰트만은 현실 변혁 위해 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에 갈등하면서 미래를 희망한다. 그러나 어니스트 블로흐는 이것을 오해하여 네오막시즘으로 이해하여 폭력으로 혁명이룸으로 이해하였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무력하다. 그 증거는 만찬석상에서 칼 두 자루다. 이와 같이 현대 신학에서는 오직 인간 예수뿐이다.
Ⅲ. 미래가 하나님이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몰트만에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깊이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또한 이 하나님은 우리 안과 위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망상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2. 미래가 하나님이다.
몰트만의 신학의 목표는 이 땅의 변혁이다. 이 땅의 바로 그 미래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 미래를 희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앞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역사적으로 우리 앞에서 걸어가시는 분이시다. 미래가 하나님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하나님을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지니신 하나님”으로 표현하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먼저 자신의 현존과 나라를 약속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이다. 또한 현재로부터 미래로 탈출하시는 하나님이며, 자신의 자유로부터 미래와 새로움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단지 생활 가운데서 희망하면서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몰트만은 영원한 하나님 아들의 가치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평가한다. 그래서 몰트만에 의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그의 가치를 형성할 뿐이다.
Ⅳ. 부조리한 사회를 고치기 위해 희망이 필요하다
1. 부조리한 사회를 고치기 위해 종말론이 필요하다.
몰트만은 현실의 사회는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이 부조리한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그는 종말론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 기독교의 종말론이 아니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종말론은 약속과 관련된 종말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푸는 열쇠이다. 오직 약속의 종말론만이 세계와 세계 속의 인간 실존의 신화적 환상적 이해 방식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이 세계의 시련과 모순, 불신앙을 참으로 진지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종말론은 현재로부터의 출발이요, 현재의 변화이다. 그리스도교는 단지 부록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종말론이요, 희망이며, 앞을 바라보는 전망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지식을 추구하는 희망’은 종말론의 출발점이다. 여기서 희망은 다른 내세가 아니며, 영적이지도 않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몰트만은 중세기에 캔터베리의 주교였던 안셀름의 “지식을 추구하는 신 -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 라는 명제를 종말론에도 적용하였다. 그래서 몰트만은 “인식을 추구하는 희망 - 나는 알기 위해 바란다.” 라는 명제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신학에 결정적 의미를 줄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몰트만은 현재는 부조리한 사회이다. 그러나 종말의 심판은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오직 이 땅에 대한 변혁이 꿈꾸는 약속의 종말론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는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데 종말론 상실하고 나니까 현실 안주하였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헤겔 이전에는 본질은 과거에 있었다. 그러나 헤겔은 본질은 현재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이제 몰트만은 본질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몰트만이 말하는 이 미래는 우리가 이루는 미래이지, 주님의 오심이 아니다.
2. 낙담과 절망이 죄의 뿌리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죽음은 비존재이다. 또한 신은 존재, 용기, 희망이다. 그러므로 신 존재는 객관적 존재 아니다. 신은 내존재 물음에 대한 답 일뿐이며, 이다. 낙심한 자에게 용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몰트만은 이 땅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낙담을 죄로 본다. 몰트만에 의하면, 낙담과 절망은 죄일 뿐만 아니라, 실로 죄의 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약함, 소심, 낙담이 죄이다. 교만의 다른 측면은 이렇게 절망, 체념, 게으름과 비탄이다. 이와 같이 몰트만은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가질 것을 말한다. 이 희망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그에게는 죄는 절망이며, 희망이 신앙이다.
Ⅴ.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사건일 뿐이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사건일 뿐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은 오직 약속의 상태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아직 자신의 시간을 앞두고 있고, ‘역사적 현상’으로서 오직 그의 미래와의 관련성 안에서만 파악되며, 이를 인식하는 자에게 역사적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를 알려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주도적인 질문 아래서 부활의 보고를 언제나 종말론적인 보고로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 사건의 종말론적 의미는 회상과 기대 가운데서 역사에 대한 감성을 일깨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 사건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과 역사를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세계나 역사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계를 하나님과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역사로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약속 사건이라 하므로 잘못된 견해를 피력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실재적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직 약속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오직 약속일뿐이다. 부활은 종말론적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적이라 한다. 여기서 종말과 종말론적이란 말을 구별해야 한다. 종말은 말 그대로 끝이지만, 종말론적이라 함은 칭의와 같이 다시 종말에 새롭게 반복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종말론적은 종말이 시간 내에 들어오는 것이다. 종말론적 과정과 종말론적 사건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심리적 교류이며, 가상적 사건이며, 가상적 교류이다.
2. 부활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발언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증명 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적 전승과 역사적 재구성의 의심스러운 형태 안에서 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역사적, 객관적 연구 속에서는 부활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증언되는 부활 사건은 결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처음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확인은 ’부활 신앙은 역사적 질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신학적 확인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부활의 ‘현실’은 더 이상 예수에게 일어난 현실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나란히 병렬시키는 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 진술의 연속을 의미할 뿐이지 사실의 병렬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동일한 지평 위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표현은 역사적 사건을 표시하고, 둘째 표현은 종말론적 사건을 표시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즉 부활은 사실이 아니다. 무의미하다.
3. 부활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부활의 ‘현실’은 더 이상 예수에게 일어난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의 현실성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역사를 다르게 경험하고 다르게 해석하는 지평과 대면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의 현실성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되돌아간다. 이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의 방향을 되돌려서 역사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4. 부활 보고는 선포일 뿐이다.
부활 보고는 ‘보고’가 아니라 신앙으로 인도하는 설교이다. 예수의 부활의 현실과 보편적인 선교적 선포는 서로 분리할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 또한 이 선포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 역사적 문제의 틀 안에서 마음과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이 선포의 정당성을 실존적으로 증명한다.
5. 부활은 부활 보고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오직 부활은 말뿐이다. 부활은 역사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경험하고 부활한 자로 경험하는 것이 부활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 신앙과 선포 안에서 그에게 하나의 현실로 다가온다. 이 현실은 인간의 실존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를 결단 앞에 세운다. 하지만 선포와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에게 매우 가까이, 그리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의 문제 안에서 반복할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실존의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이처럼 오늘 신앙의 설교를 직접 들음으로써만, 오늘 주님을 바라봄으로써만, 오늘의 구원을 주는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에 오늘 순종함으로써만, 우리는 부활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된다. 부활의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케리그마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에 직면하여 우리는 더 이상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없다. 오히려 케리그마는 ‘우리가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예수를 부활한 자로 선포하는 설교는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움직여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현실’로 나타나도록 설교해야 한다. 이처럼 ‘현실’을 실존과 관련된 사건으로, 혹은 ‘마음과 양심에’ 다가오는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역사 이해의 새로운 방식이 생겨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술들은 단지 그가 과거에 어떤 자였고 지금은 어떤 자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가 장차 어떤 자가 될 것이며 우리가 그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진술들을 함축한다. 그 모든 진술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다.”(골 1:27)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단지 부활했다는 선포를 듣고 믿음으로 부활자체가 의미가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제자들의 경험이다. 제자들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본 것이 부활이다. 예수는 인간예수 뿐이다. 아버지가 있는 줄 알고 부르므로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므로 예수는 아들이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제로 없다. 아버지는 단지 가상된 존재이다.
6. 십자가에 달린 자와 부활한자는 변증법적으로만 동일하다.
몰트만에 의하면, 오직 부활한 자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수수께끼와 같은 변증법적 동일성만이 원시 교회의 그리스도론과 예수의 메시지 자체의 연속성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부활한 예수의 이 동일성을 표명하고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칭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부활한 자의 미래를 미리 파악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부활의 현현 속에서 예수는 바로 미래에 참으로 존재할 자로 인식된다. 이와 같이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한 자와 십자가에 달린 자는 실재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동일하다. 결국 말장난이다. 현대 신학은 예수는 단지 인간이다. 그리스도는 영으로서 영향력, 감화, 모본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예수가 부활하므로 그리스도 입증하나, 부활자가 미래에 있다. 예수와 그리스도는 모순이라 한다.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희망이다.
Ⅵ.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사건이다.
몰트만은 이 땅의 미래의 소망을 위해서, 하나님 조차 사건으로 격하시킨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긴장으로 가득한 변증법적인 역사가 바로 <하나님>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자기 자신과 사물에 완전히 전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완전히 현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현재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희망과 변화 가운데서 그분의 약속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때, 이 하나님은 현존하신다. 몰트만은 여기서 하나님이 사건이라면 기도할 수 없으므로 그는 교묘히 “한 사건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기도한다.”고 괘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하늘의 당신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황당한 이론일 뿐이다. 결국 몰트만에게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 몰트만은 불트만과 발트의 신학위에서 신학을 했다. 불트만은 선포하므로 사건화 된다. 불트만의 제자인 몰트만은 언어가 사건화 된다고 하였다. 틸리히도 하나님 존재를 선언하면 사건화 된다. 즉 하나님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발트는 하나님이 비필연적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사건화, 현실화된다. 인간이성이 보편화되는 것이 절대정신이지 하나님이 절대정신이 아니다. 헤겔은 activism(actualism)이다. 발트는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아들, 하나님이라 부르므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성은 십자가의 사건이다. 또한 이것은 역사를 위한 사건에 불과하다. 이것은 변증법적 사건이다. 여기서 변증법적 사건이란 의미는 정으로서는 아들의 고통이며, 반으로는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다. 합은 성령이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 사건이며, 십자가상의 사건이다. 후기 불트만 학파인 틸리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선포하면 즉 언어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발생한다. 이렇게 해서 몰트만의 출현의 분위기를 형성되었다. 정통교리의 영원과 구속개념을 비판하며, 자기의 견해를 전개한다. 어니스트 블로흐는 물질은 열려있으며, 인간도 열려 있다고 한다. 본질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는 자기 손에 있다고 하였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견해를 따라 자기 견해를 전개한다.
2.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와 그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은 십자가 위에서 버리시는 아버지와 버림받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은 종말론적으로 파악한다.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의 현재적 영 가운데에서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3.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땅의 변혁된 미래를 바라면서, 현재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하여,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예수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였는가를 인식할 때만 기독교 신학은 세계사에 있어서 고난 받는 자들과 항거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고난 가운데 있고 고난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 속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고통과 죽음 가운데서, 종국적으로는 예수의 죽음 가운데서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식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나아가는 유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모순, 고통,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이다. 즉 몰트만에게는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적 역사의 시작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고통을 통하여 얻는다. 결국 몰트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고 고통만 있으면 된다. 하나님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참여하기만 하면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4. 십자가의 사건은 삼위일체론적이다.
몰트만은 이 땅의 미래를 희망하면서, 현재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하여, 몰트만은 십자가의 사건을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기초한 기독론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성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일어난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삼위일체론의 장소는 <사고의 사고>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예수의 죽음은 신적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삼위일체론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에 대하여 삼위일체론적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형식은 삼위일체성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내적 삶이다.
삼위일체성은 그 자신 안에 폐쇄된 하늘의 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을 위하여 열려진 종말론적 과정을 뜻한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삼위일체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 내의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반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의 인격의 총체적인 면모로부터 출발하여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 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성을 변증법적 사건으로, 아니 십자가의 사건으로 파악한다. 삼위일체성은 신앙의 종말론적 해석과 함께 일어나는 십자가의 사건이다. 역사를 위한 사건을 의미하는 삼위일체성은 삼위일체론적 완성을 지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의 삶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성을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역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성은 사랑과 해방의 역사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 자신이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은 실제적인 전의적 의미에서 이 순교자들과 무언의 희생자들에게 해당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아우슈비츠도 하나님 자신 안에 존재한다. 즉 아우슈비츠 같은 참혹한 고통도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희생과 성령의 힘 속으로 수납되어져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몰트만은 오직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변혁을 소망하면서, 고통 받는 자들의 고난을 십자가의 고난과 같이 놓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의 사건에서 양성론의 틀 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이해 못한다. 왜냐하면 신성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인성만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한 설정이다. 성부는 예수가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성부가 있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격이 아닌 사건이다. 삼위일체는 사건으로 발생한다.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교통의 교류가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론적이지 삼위일체가 아니다. 예수가 아버지라고 불렀기에 아들이라 부른다. 아버지,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다. 인간 예수뿐이다.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되는 것 즉 고통의 교류가 성령이다.
5.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몰트만은 오직 이 땅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이 죄를 위한 죽음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정통 기독교의 속죄론을 거절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알트하우스(P.Althaus)의 글을 인용하면서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죽었다고 한다. 또한 몰트만에 의하면, 그의 죽음 가운데서, 모범적인 순종의 고난과 그의 소명에서 충성스러운 보증을 보았던 신프로테스탄트적 예수론은 물론이지만, 십자가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로부터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그것을 화해의 죽음으로서 인간의 죄와 연결짓는 것은 옛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더 막중한 결함이었다. 이것은 몰트만이 저 천국이 아니라 오직 이 땅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6. 발트나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단순한 사변일 뿐이다.
몰트만은 발트의 삼위일체론만은 제대로 파악하였다. 발트와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으로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이 자존적으로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된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으로 하나님이 된다. 이것은 행동주의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발트에게는 미래 약속이 결여됨을 비판하였다. 몰트만에 의하면, 발트는 삼위일체론의 맥락 안에서 자기 계시의 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결합하였다. 삼위일체론은 자기 계시의 전개, 즉 ‘하나님의 말씀’ 사건의 주체, 술어와 대상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생겨난다.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곧 계시하시는 자(아버지), 계시사건(성령)과 계시된 자(아들)이다. 이와 같이 발트는 계시의 도식으로 삼위일체성 이해했다.
몰트만은 발트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비판한다. 슐라이마허에 의하면, 유일신론적 종교에서 다신론 세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삼위일체론이 필요했다. 그런데 몰트만에 의하면, 고대의 순수한 이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삼위일체로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빙성이 없으며 단지 사변으로 나타날 뿐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론 이해는 항상 부활의 영인 성령의 역사적-종말론적 특징을 은폐할 위험에 빠진다. 슐라이에르마허가 타당하게 말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의 모든 새로운 수정은 <그의 근원에로 돌아가는 변형>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삼위일체론을 완전히 새롭게 변형시킬 것을 암시하였다. 오늘날 시도되어야 할 일이 바로 삼위일체론을 그 근원에 이르기까지 변형시키는 일이다. 몰트만은 더 나아가 루터를 단일신론자로 왜곡한다. 루터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 있는지는 매우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가 그리스도는 아니시기 때문이다.
Ⅶ. 성령은 십자가 사건에서 발생한다.
몰트만은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의 현장에서 성령이 발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난 받는 자들이 모두 성령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열광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아들의 죽음은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이다. 골고다의 사건에서 미래를 열어 주고 삶을 창조하는 영이 생성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성령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의 성령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생성된다.
이와 같이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은 영원 전부터 현존하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서 발생되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아들의 죽음은 성령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이다. 이 성령은 결코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결코 고통받는 자들을 도울 수가 없다. 단지 몰트만이 이 허구적인 영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주장한 것뿐이다. 이것은 헤겔의 activism(actualism)의 영향이다. 몰트만은 성령을 가상적인 아버지와 가상적인 성자와의 교통의 교류로 본다. 또한 몰트만은 아버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고통의 결합이 사랑이며 성령이라고 본다. 몰트만은 예수 사건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의 사건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성령이 발생을 말한다. 하나님은 도덕적 상을 투사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투사일 뿐 인 것이다. 근세인의 이상은 하나님 없는 완성인데 완성되었다.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삼위일체론적으로 완성됐다.
Ⅷ. 복음 선포는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할 뿐이다.
1.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참여하고 있다.
몰트만은 현재의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자들은 벌써 하나님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담대히 미래를 희망하게 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론적 사고에 의하면, 버림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버림받음을 통하여 〈신적인 역사〉에로 이미 통합되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며, 우리 안에 계신다. 사랑이 고통을 당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고통을 받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선택된 백성의 계약 상대자가 되시며, 이리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결속되기 위하여 할례와 낮추시며 한계와 조건 없이 모든 인간 존재를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모든 인간은 그의 모든 삶과 함께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몰트만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참여에는 믿음이 필요 없다. 오직 고통 중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을 참여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믿음이 없어도 의인으로 인정하신다. 몰트만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신다고 주장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이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 없는 죽은 자들을 의롭다 인정하여 주며, 버림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죽은 자들마저 살게 한다.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과 세리와 사귐을 나누는 그의 은혜로운 행위 안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고,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안에서 동터오며,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다시 살리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 있듯이,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통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3. 모든 사람들을 믿음 없어도 의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몰트만은 정통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왜곡된 주장을 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과정과 순서는 이방인들을 부르는 것,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 살아있는 희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은 허무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구원을 잃어버린 자들, 하나님이 없는 자들, 죽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창조적인 사건이다. 그는 은혜의 법 가운데에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없는 자들을 의롭게 하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적인 불의의 상황 속에서 기대한다.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몰트만이 성경과 정통 기독교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이다. 성경은 결코 믿지 않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4. 복음 선포는 진리가 아닌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할 뿐이다.
몰트만은 고통 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복음 선포는 사실에 대한 진리 선포가 아니라, 변화를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몰트만은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권내에 있는 고통 받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익숙한 부활과 칭의교리의 용어들을 빌려서 자기의 잘못된 사상을 전개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복음 선포는 교리 속에서 지혜와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율법에 따른 인생의 도리와 그 변화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을 알리는 것, 이를 드러내는 것, 이를 천명하는 것이다. 또한 몰트만에 의하면,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오고 있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왜곡하였으며,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고통 받으면서 이 땅의 변혁을 희망하는 자들을 하늘로부터 구속을 받은 자들로 잘못되게 바꾸었다. 오직 우리 자신의 역사의식이 사명 의식으로 표출될 때, 비로소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일컬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가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몰트만이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5. 계시는 교리전달이 아니라 자기 실존 이해일 뿐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자아실현 인간의 참된 자기 이해를 목표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만약 계시를 통해 그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난다면,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신성도 역시 그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는 세계관적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말을 건넬 뿐이다. 설교는 그 자체로서 계시이다. 계시된 내용은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이 계시된 것이다. 계시의 ‘순간’ 속에서 창조와 구원은 하나가 된다. 계시되는 내용은 계시가 일어나는 사건과 동일하다. 계시는 현존하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특징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특징을 지닌다. 그래서 계시는 종말론적 성격의 것이다. 여기서 약속은 현존하는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미래로 나아가는 그 자신의 과정을 열어 준다. 이와 같이 몰트만이 분석한 불트만에 의하면, 계시는 주관성 이해이다. 또한 신앙의 결단이 계시이다. 계시 목표는 인간의 구원이다. 계시가 오므로 인간의 자기 이해가 확실해지며, 선포하면 자기 이해가 이루어진다. 자기 이해하면 그것이 계시가 된다. 계시는 자기 실존이해이다. 계시는 주관을 이해하는 것이다.
Ⅸ. 나오는 말
이제까지 필자는 몰트만의 신학과 그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타락하여서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함을 보았다. 그는 양심이 무디어져서 성경까지도 왜곡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하나의 사건으로 모독한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도 이러한 불경스런 일이 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은 현실이다.
몰트만은 세상에 속한 사상인 근세 철학 위에서 신학을 전개 했다. 희망의 신학과 또한 이와 비슷한 아류들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 땅의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처럼 묘사하므로 사람들은 쉽게 이 신학을 따랐다. 그러나 몰트만의 목표는 하늘이 아니라 오직 이 땅 뿐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결국 세상에 속한 말만을 할 뿐이다. 몰트만도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 그는 하늘나라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땅만을 말한다. 오늘날도 마귀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거짓으로 이들을 미혹하여 더욱더 허무와 수렁텅이로 빠뜨린다. 이때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마귀의 궤계를 깨뜨리며, 연약한 자들을 구할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몰트만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의 신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