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조창훈
Jϋrgen Moltmann,『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7),
몰트만에 의하면, 신앙은 투쟁이다.
p.43.
신앙의 자유와 확실성과 기도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영의 내적인 경험이 그리스도의 미래와 해방된 피조물의 선취(Antizipation-여기서 서철원 교수는 예상, 기대라고 번역하였음)라고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게토(Ghetto)의 개방, 병든 사람의 회복, 사회정의를 위한 새로운 법률 혹은 효과적인 해방의 혁명도 그리스도와 그의 해방된 피조물을 앞당겨 오는 선취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상황의 수평적 차원과 대립되는 신앙의 수직적 차원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다가오는 새 창조의 세력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죽음을 초래하는 이 세상적 구조 세력과 투쟁하고 있다.
몰트만은 사회 변혁을 꿈꾼다.
p.45.
기독교적 실존은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뒤를 따르면서 인간 자신과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의 신학은 실천적인 이론이다.
p.114.
십자가의 신학은 한 실천적인 투쟁의 논리이며,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의 이론도 될 수 없고, 세계사적인 기독교 이론도 될 수 없다. 이 신학은 변증법적 역사신학이며 세계사의 신학이 아니다.
몰트만은 영원한 하나님 아들의 가치를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평가한다.
p.147.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혹은 참된 인간성의 모범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그의 가치를 형성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이나 마음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p.201.
이 나라는 예수의 이질성 가운데서 예수 자신을 통하여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선포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비정치적인 것’이라 부를 수 없으며, 그것을 하늘의 영역이든 아니면 내면적 마음의 영역이든 어떤 다른 영역에로 추방 시킬 수 없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며 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투쟁과 복수의 조직과 규칙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인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예수의 죽음이 의롭게 만들었다.
p.261.
그는 은혜의 법 가운데에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없는 자들을 의롭게 하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적인 불의의 상황 속에서 선취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화목제가 아니다.
p.280.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기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죽었다“라고 알트하우스(P.Althaus)가 함축성 있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 가운데서, 모범적인 순종의 고난과 그의 소명에서 충성스러운 보증을 보았던 신프로테스탄트적 예수론은 물론이지만, 십자가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로부터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그것을 화해의 죽음으로서 인간의 죄와 연결짓는 것은 옛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더 막중한 결함이었다고 생각했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즉 부활은 사실이 아니다.
p.286.
<십자가와 부활>을 나란히 병렬시키는 것은 단지 시간적으로 회피할 수 없는 진술의 연속을 의미할 뿐이지 사실의 병렬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은 동일한 지평 위의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표현은 역사적 사건을 표시하고, 둘째 표현은 종말론적 사건을 표시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의 사건은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기초한 기독론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봐야 한다.
p.288.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삼위일체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 내의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반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의 인격의 총체적인 면모로부터 출발하여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 하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고통을 통하여 얻는다. 결국 몰트만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다.
p.298.
그러므로 그분의 인식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나아가는 유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모순, 고통,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을 말한다......(p.302) 하나님의 존재를 고통과 죽음 가운데서, 종국적으로는 예수의 죽음 가운데서 생각하여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고난이다. 그러므로 고난에 참여하기만 하면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p.322.
십자가에서 예수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였는가를 인식할 때만 기독교 신학은 세계사에 있어서 고난 받는 자들과 항거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는 고난 가운데 있고 고난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 속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루터를 단일신론자로 왜곡한다.
p.332.
루터에 의하면......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단순한 사변일 뿐이다.
p.340.
슐라이에르마허는 삼위일체론을 완전히 새롭게 변형시킬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을 그 근원에 이르기까지 변형시키는 일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시도되어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대의 순수한 이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삼위일체로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빙성이 없으며 단지 사변으로 나타날 뿐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p.343.
슐라이에르마허가 타당하게 말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의 모든 새로운 수정은 <그의 근원에로 돌아가는 변형>일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론의 장소는 <사고의 사고>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이다......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p.344)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은 가상적인 아버지와 가상적인 성자와의 교통의 교류이다. 또한 이 성령은 하나님 없는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준다. 몰트만은 아버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고통의 결합이 사랑이며 성령이다. 헤겔의 activism(actualism)의 영향이다.
p.347.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성령이며, 이 성령은 하나님 없는 죽은 자들을 의롭다 인정하여 주며, 버림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죽은 자들마저 살게 한다......(p.350)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의 성령이라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이것은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생성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의 사건에서 양성론의 틀 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이해 못한다. 왜냐하면 신성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인성만이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한 설정이다. 성부는 예수가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성부가 있는 것이다.
p.350.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신적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삼위일체론적 사건으로 해석하였다.....(p.351) 십자가 위에서 버리시는 아버지와 버림받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신앙은 종말론적으로 파악하여,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의 현재적 영 가운데에서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건으로, 즉 예수와 그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할 경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에 대하여 삼위일체론적으로 얘기하게 된다......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형식은 삼위일체성이다......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의 삶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격이 아닌 사건이다. 삼위일체는 사건으로 발생한다.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교통의 교류가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론적이지 삼위일체아니다. 예수가 아버지라고 불렀기에 아들이라 부른다. 아버지,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다. 인간예수뿐이다.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에게 전달되는 되는 것 즉 고통의 교류가 성령이다. 몰트만은 불트만과 발트의 신학위에서 신학했다. 불트만은 선포하므로 사건화된다. 불트만의 제자인 몰트만은 언어가 사건화된다고 하였다. 틸리히도 하나님 존재를 선언하면 사건화된다. 즉 하나님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발트는 하나님이 비필연적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헤겔에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사건화, 현실화된다. 인간이성이 보편화되는 것이 절대정신이지 하나님이 절대정신이 아니다. 헤겔은 activism(actualism)이다. 발트는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아들, 하나님이라 부르므로 그렇게 된다고 주장한다.
p.352.
이제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나의 생각에 의하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긴장으로 가득한 변증법적인 역사는 추가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라 표현될 수 있다......(p.353) <하나님>은 하나의 다른 본성이나 하나의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성의 역사가 아니라, 골고다의 사건, 즉 미래를 열어 주고 삶을 창조하는 영이 거기서부터 생성되는 아들의 사랑과 아버지의 고통의 사건이다......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하늘의 당신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기도한다. 우리는 한 사건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안에서> 기도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제자들의 경험이다. 제자들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본 것이 부활이다. 예수는 인간예수 뿐이다. 아버지가 있는 줄 알고 부르므로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므로 예수는 아들이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실제로 없다. 아버지는 단지 가상된 존재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적이라 한다. 여기서 종말과 종말론적이란 말을 구별해야 한다. 종말은 말 그대로 끝이지만, 종말론적이라 함은 칭의와 같이 다시 종말에 새롭게 반복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종말론적은 종말이 시간내에 들어오는 것이다. 종말론적 과정과 종말론적 사건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심리적 교류이며, 가상적 사건이며, 가상적 교류이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 사건이며, 십자가상의 사건이다. 후기 불트만 학파인 틸리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선포하면 즉 언어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발생한다. 이렇게 해서 몰트만의 출현의 분위기를 형성되었다.
p.355.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내적 삶이다......삼위일체성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일어난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삼위일체성은 그 자신 안에 폐쇄된 하늘의 원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p.356)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을 위하여 열려진 종말론적 과정을 뜻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건이다. 아들의 죽음은 성령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이다.
p.360.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성은 십자가의 사건이다. 또한 이것은 역사를 위한 사건에 불과하다. 이것은 변증법적 사건이다. 여기서 변증법적 사건이란 의미는 정으로서는 아들의 고통이며, 반으로는 아들의 고통이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다. 합은 성령이다.
p.364.
우리는 삼위일체성을 변증법적 사건으로, 아니 십자가의 사건으로 파악하며, 그런 다음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역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p.365) 삼위일체성은 신앙의 종말론적 해석과 함께 일어나는 십자가의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성은 사랑과 해방의 역사인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위한 사건을 의미하는 삼위일체성은 삼위일체론적 완성을 지향한다.
몰트만은 예수 사건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의 사건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성령이 발생을 말한다. 하나님은 도덕적 상을 투사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투사다. 근세인의 이상은 하나님없는 완성인데 완성되었다.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삼위일체론적으로 완성됐다.
p.365.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론적 사고에 의하면, 버림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버림받음을 통하여 〈신적인 역사〉에로 이미 통합되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삶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며, 우리 안에 계신다. 사랑이 고통을 당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고통을 받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희망이다. 종말론은 부조리한 사회를 고치는 것이다. 현재는 부조리한 사회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심판은 신화에 불과하며, 없다.
p.366.
그러므로 종말론은 현재로부터의 출발이요, 현재의 변화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혹은 <존재의 깊이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으로, 역사적으로 우리 앞에서 걸어가시는 분, <희망의 하나님>이라 파악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믿음과 상관없이 그냥 살기만 하면 하나님에 참여하는 것이다.
p.399.
오히려 하나님은 한 선택된 백성의 계약 상대자가 되시며, 이리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결속되기 위하여 할례와 낮추시며 한계와 조건 없이 모든 인간 존재를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모든 인간은 그의 모든 삶과 함께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고통이 곧 하나님이다.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적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p.402.
바이젤이 말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하나님 자신이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은 실제적인 전의적 의미에서 이 순교자들과 무언의 희생자들에게 해당한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아우슈비츠도 하나님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즉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희생과 성령의 힘 속으로 수납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우슈비츠나 이와 유사한 참혹한 장소를 타당화시킴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신앙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다른 자유의 운동과 협력해야 한다.
p.438.
만약 우리가 정치학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결과를 끌어내어 보고자 시도할 때, 이것은 교회와 국가 혹은 교의학적 신조와 정치적 행동 간의 관계를 추상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것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인간의 삶과 살아 있는 인간성을 방해하고 억누르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정치의 종교적인 문제들, 즉 법, 억압 및 악순환의 문제들과 구체적으로 관여되어야 한다. 신앙의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의 영역 내에서 영위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는 인간에게 자유케 하는 행동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 악순환은 하나님 안에서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자유로부터 자유케 하는 해동으로 나아가는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전개되는 다른 자유의 운동과 협력하게 된다. 하나의 정치적 해석학을 위해서 사회주의 운동, 민주주의 운동, 인도주의 운동 및 반종족주의 운동과의 대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몰트만에 의하면, 삶의 다섯가지 차원에서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몰트만의 목표는 하늘이 아니라 이 땅뿐이다.
p.458.
1) <삶의 경제적 차원>에서의 해방은 건강, 영양, 의복 및 주택에 대한 인간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2) <삶의 정치적 차원>에 있어서 억압의 악순환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이것을 넘어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p.459.
3) <삶의 문화적 차원>에서 인간을 소외의 악순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동일성을 의미한다.
p.460.
4) <자연에 대한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을 산업적인 자연 파괴의 악순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자연과의 평화를 의미한다.
p461.
5) 삶의 의미에 대한 인간, 사회 및 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해방이란 의미 깊고 전체적인 것의 의미로 채워진 삶을 의미한다.
p.463.
민주주의가 없이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며 사회주의가 없이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역사가 증명하듯이 사회주의적 운동이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만약 우리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간과한다면 인간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가 없으며 인종적인 동일성조차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p.464.
그러므로 모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 다섯 가지의 차원에 있어서의 해방이 동시에 시도되어야 한다.
보충
발트는 계시의 도식으로 삼위일체성 이해했다. 몰트만은 바보의 번벅이다. 슐라이마허는 유일신론적 종교에서 다신론 세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삼위일체론이 필요했다고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자연을 정복해서 자유 극대화하는 것이 근대인의 이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부조리한 제도, 산물이 자유 억제한다. 그러나 오직 참아야 한다. 그러나 어니스트 블로흐는 이것을 오해하여 네오막시즘으로 이해하여 폭력으로 혁명이룸으로 이해하였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는 무력하다. 그 증거는 만찬석상에서 칼 두자루다. 현대 신학에서는 오직 인간 예수뿐이다. 칼발트는 인간예수는 신존재동참=구원=화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