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에 입각한 로마서 강해9(로마서5:3-11)
칼빈주석에 입각한 로마서 강해9(로마서5:3-11)
서론
베드로전서 2장 20,21절을 보면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시지만 또한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부르심을 받은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싫어하고 도망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다.
본론
1.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가?(5:3-4), 성도들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5) 연단-체험, 인격으로 번역됨. 스토아학파는 고통을 부인함.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3),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4)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3절을 보면, 성도들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한다. 이 말씀은 환난이 왔을 때 전혀 고통스럽지 않거나 전혀 두렵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주는 아픔으로 인하여 슬픔에 잠기게 될 수도 있다. 환난과 역경 자체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환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케 하신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환난과 역경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소망을 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난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터뜨린다. 또한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환난들은 완악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다만 분노와 불만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러므로 인내란 환난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다. 누구나 인내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인내를 하고 연단을 하므로 소망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도 성령께서 불어넣으신 위로로 인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4절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이라는 말씀에서 ‘연단’(probation)이라는 단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에 대해서 갖는 체험(experience)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환난에 의해서 자극을 받아 인내하게 된다. 여기서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격려하여 소망을 품게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지쳐 탕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느끼기 때문이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5)”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풍성한 위로이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갈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실 때, 우리의 바로 그 재난들은 분명히 번영과 기쁨으로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쓰임에 틀림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인하여, 십자가의 모든 고난들을 뒤엎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좋은 선물들이 인간들의 귀와 눈과 마음에게는 감취어져 있고, 성령만이 그 선물들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사인 “부은바 됨이니”라는 말은 아주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너무도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몸의 전체에 넘치도록 부은바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랑은 역경 중에서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며, 달콤한 조미료처럼 우리의 환난에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어거스틴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어떠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6-8) 여기서 연약할 때라 함은 무슨 말인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7)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10)
연약할 때-경건치 않은 때-죄인되었을 때-원수되었을 때
연약할 때-로마교는 병든 상태로 해석, 그래서 자유의지는 그대로 존재한다 주장. 알미니안과 웨슬레는 선행은총으로 자유의지가 회복된다 주장. 그래서 “결단”을 강조함. 선행을 행할 수 있다 주장.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의 통일성에 입각하여 해석할 때 죽은 상태로 해석함. 전적 부패로 인한 전적무능력주장.
6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는 말씀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화목되기 전의 때임을 말씀한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는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기까지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란 말씀은 우리가 아직 경건치 않은 자들었을 때란 말과 같다. 또한 이 말씀은 8절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와 같은 말이며, 또한 10절의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란 말과 같은 말이다. 즉 연약할 때, 경건치 않았을 때, 죄인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란 말씀은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을 때란 뜻이다. 즉 전적으로 부패하고 죄에 젖은 자들이었을 때를 의미한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전혀 무가치하고 하나님에 의해 귀여움 받기에는 부적합한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자비는 인간들에게서는 결코 찾아 볼 수가 없다.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확증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사랑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바 없이,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대로(요3:16) 그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3.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근거는 무엇인가?(9-11)
구원의 4원인-형상인, 질료인, 도구인, 목적인 , 질료인-그리스도의 피, 성도의 견인, 예수님의 소극적 고난- 십자가에서 고난, 피흘리심, 예수님의 적극적 고난- 율법의 적극적 준수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것이니라(10)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 점을 우리가 깨닫는 것 말고는 달리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의를 확실히 얻으셨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지금에는 9절의 말씀처럼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더욱 더 보호해 주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한번만 구원을 확보하시기만 하고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안전하고 확고하게 견지하지 않으신다면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하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정해진 수명을 다 살기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은혜를 거두실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우리를 적대시하셨다. 그런데 이 죽으심으로 성취한 속죄로 말미암아 이제는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시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버지께 화목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은혜를 우리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베풀어 주시고 날마다 그것을 증가시켜 주신다.
또한 화목하게 된 우리들은 10,11절 말씀처럼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 우리는 확실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사망 가운데서 건지셨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난을 그냥 못보시고 넘어가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서 우리 안에 인내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연단을 받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위로로 소망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속에 있을 때에나 즐거울 때에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위로로 우리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정리-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크신 위로로 가득 부어주시기를 바란다.
기도
주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간에 항상 주님께서 부어지시는 성령의 위로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